[가효국충②] 언론·역사학자·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STB 상생방송 「인간의 길 가효국충」 독립운동가 특집방송_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으로부터 듣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은 것이 실정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신하였던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그의 충忠을 세상에 남겼다. 단재 신채호 선생 역시 一片丹心의 단丹자를 취하여 단재라는 호를 지었다. 평생을 조국을 위해, 진리를 위해, 민족을 위한 단심을 다짐한 것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업적을 정리하자면 대략 스무 가지로 정리한다.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그의 인생을 정리해보자.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익동 도림리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신채호. 10살에 행시를 짓고 13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할 정도로 명석했던 그는 19살에 재상 신기선의 도움으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된 신채호는 같은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입신양명이 보장된 성균관 박사직을 내려놓고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한다.

그 무렵 시종무관장이었던 민영환 선생이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자결을 하고 장지연이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글인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황성신문에 실었다가 투옥된다. 그 무렵 신채호 선생은 그의 호를 단재로 짓고 장지연 선생을 대신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로 활동하고, 1907년 항일구국비밀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을 역임 한다.
일제를 겨눈 그의 글이 얼마나 매서웠던지 조선통감부의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마저 그의 글을 언급하며 경계할 정도였다. 신채호 선생은 또한 논설발표, 영웅전기, 한국고대사를 쓰는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게 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자 여러 애국지사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여 격렬한 항일논설로 일본 통감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나아가 1911년에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에서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1913년 박은식, 조소앙과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여 청년들에게 직접 집필한 조선사(朝鮮史)를 가르친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백 번 읽는 것보다 우리 조상들의 만주지역 고대유적을 한번이라도 둘러보는 것이 역사의식에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1918년 신규식 등과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를 조직한 선생은 1919년 3.1혁명 소식을 듣고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을 맡게 된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대표로 선출된 이승만의 미국 위임 통치설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나고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일제를 공격하는 동시에 임시정부의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다.

이후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과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에서 활동한 선생은 비밀 결사단체인 보합단(普合團)과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한다. 다물단은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 유민들이 만들었던 비밀단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연경대학교에 재학 중인 애국여성 박자혜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되지만 1922년, 생활고 때문에 부인과 아들을 고국으로 귀국시키고 신채호 선생 홀로 중국 관음사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한다. 이 시기는 그가 역사연구에 박차를 가한 시기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 『조선사연구초』 등과 같은 우리 고대사의 정사를 거침없이 써냈다. 만약 신채호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고대사, 조선사 원 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료는 전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1923년 1월 어느 날, 의열단장 김원봉이 찾아와 그의 부탁으로 우리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활동이었던 의열단 활동을 선언하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고 1924년엔 다물단을 다시 조직하여 다물단 선언서를 집필한다.
그리고 1925년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한 아나키스트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지만 자금조달을 위해 이동하던 중 일본 해상경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된다.

1930년 징역 10년형을 구형받은 신채호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낯선 이국땅의 차디찬 감옥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해는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고국에 송환되어 옛 집터인 충북 청원군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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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라 기자 singleorig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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