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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효국충③] 통일정부 수립의 상징 백범 김구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으로부터 듣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가효국충③] 통일정부 수립의 상징 백범 김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으로부터 듣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STB 상생방송 「인간의 길 가효국충」 독립운동가 특집방송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서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뿐 아니라 죽어서도 그 이름이 회자되며 인류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다. 백범 김구 역시 그러하다. 김구 선생은 역사가 흐를수록 우리 역사현장에 걸어 나와 우리 국민과 대화를 하고 젊은 세대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있다. 생애의 모든 것을 조국광복을 위해서 바친 독립 운동가이자 절세의 애국자. 김구선생의 생애를 들어 본다.

1876년 8월 29일, 김구 선생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강제개방이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이 이뤄진 해에 태어났다. 8월 29일은 1910년에 경술국치가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엄청난 화력과 군사를 동원해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날. 얄궂은 운명은 그렇게 그를 역사의 중심에 던져 놓았다.

아명은 김창암, 커서는 창수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후에 김구라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의 호는 백범白凡, 가장 천대받는 백성과 민중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는 그의 다짐이 담겨 있다.

김구의 본관은 안동으로, 안동 김 씨는 한때 왕족을 능가할만한 세도가 집안이었지만, 권력 구도에서 밀려남으로써 몰락한 양반가였다. 당시 조선말은 반상제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관습적으로 남아 있던 시대였다. 과거 급제가 유일한 신분상승제도였으므로 김구 또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8년간 과거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삼정이 문란하고 나라가 부패하여 과거급제자를 미리 정해놓고 시험을 보는 지경이었고 뒷배랄 것이 없었던 김구가 당연히 합격할 리가 없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그 때 김구나 이승만이 과거에 급제했다면 우리나라 근대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말한다. 나라가 부패하여 그들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구는 18세에 동학에 입도한다. 동학은 앞으로 인간으로 강세하시는 천주님 모시는 시천주 시대를 선언하고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 것을 선언한 최제우의 가르침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김구는 20살에 동학군을 지휘하여 황해도 해주성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일본의 신식무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고 일본군에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김구는 당시 신천 지역 진사였던 안태훈의 집에 의탁하여 몸을 숨기며 그의 아들들과 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안태훈의 아들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안중근이 영기(英氣)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 뛰어났다고 적고 있다.

이때 김구가 스승 고능선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유학의 실천정신과 의리가 독립운동하면서 한 번도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던 대장부의 길을 걸을 수 있던 지침을 마련해주었다. 고능선의 권유로 국제정세를 살피기 위해 청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압록강 근처에서 의병장 김이언을 만나 고산리 전투에서 의병으로 참여하였으나 패배하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그때 궁에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 미우라 고로에 의해 궁에서 시해되었다. 이게 큰 충격을 받은 김구는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왜병 쓰치다를 처단한다. 며칠 후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사형을 받았으나 형무소를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몸을 숨기며 승려생활을 하였다.

영천암 주지를 하였으나 날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일제의 국권 침략이 심해지는데 남아가 되어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24세에 환속한다. 그리고 1903년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고 교육활동, 포교 활동을 하며 29세에 최준례라는 여성과 결혼을 한다.

1905년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신민회는 당대의 민족청년지사들의 모임이었다. 미국으로 쫓겨 갔던 안창호가 근대적 공부를 한 뒤에 들어와 신민회 내부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제가 논의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가 있었다. 이 일로 안중근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던 인물들을 여럿 잡아 들였는데, 김구도 포함되었고 1개월 만에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1911년에는 일본 총독 데라우치가 주도하여 일본 총독 암살 시도가 있다는 명목으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민족종교 대표 600여명을 무자비로 잡아들이고 반일인사를 발본색원하려 하였다. 그 중105인을 기소하였는데 김구 또한 포함되어 15년 형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호를 백범으로, 이름을 김구로 바꾼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백성과 범인을 위해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4년 만에 일본 정세의 변화로 가석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 농촌계몽운동을 펴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에 3.1운동이 일어났고 4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4월 13일에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초대 국무총리로 이승만이 당선되고, 김구는 경무국장을 맡았다.

얼마 후 이승만이 자질 부족, 미국 독립자금 횡령을 이유로 탄핵당하고 김구가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습하여 이끌게 된다. 한편 김구는 1931년 한인애국단을 창단한다. 한인애국단은 일본 주요 인사를 처단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단체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 애국청년들이 참여 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성공은 중국과 일본 모두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당시 일본에게 밀리고 있던 중국은 대한제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무시해 왔으나 중화민국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윤봉길이라는 청년,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김구와 임시정부를 높이 산다.

일본 역시 크게 위기감을 느끼고 중국을 압박하여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머물지 못하도록 한다. 결국 임시정부는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지고 김구 또한 상하이를 탈출하여 해염 지역으로 피신한다.

5년 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김구는 중국의 보호 하에 임시정부를 다시 복원하여 여러 군데로 이동하면서 활동한다. 1938년 5월에 김원봉의 조선혁명당과 합당하기 위한 합당대회에서 이운한이라고 하는 밀정에게 총상을 입는다. 총알은 심장을 용케 비껴갔지만 큰 후유증을 얻고, 죽을 때 까지 가슴에 총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때부터 손 떨림 현상을 얻어 이 후 그의 글씨에는 떨림이 묻어난다. 그래서 그의 글을 떨림체, 총알탄 이라고도 한다.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선생의 역할이 크다. 중경으로 임시정부가 옮겨간 후에 카이로 선언을 앞두고 김구는 장개석 중국의 총통을 만나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당시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임시정부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전 세계에 식민지가 100여개 정도 되었는데 그 중에 조선의 독립을 언급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후 포츠담 회의에서도 카이로선언에 있었던 이야기를 확인했고, 그리하여 실제 일제가 패망한 후에 조선이 독립수순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광복군을 조직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내로 진입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이 원폭을 맞으며 항복을 해버리면서 자주독립을 할 기회를 잃게 된다.

승전국인 소련과 미국의 주도로 일본이 물러가고 조선이 독립을 맞게 되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남과 북을 갈라 점거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체를 요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는 27년 동안 천지를 유랑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개인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 고함’ 이라는 글을 통해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경고 했다. 그러나 김구선생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분단의 역사를 걷게 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3년 후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다시 겪는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김구는 참석을 거부한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을 추종하는 암살단에 의해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통관하며 역사의 현장에서 오직 조국과 민중을 위해 살았던 그의 삶을 돌아볼 때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김구 선생의 묘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에 모셔져 있다.

 

본 방송은 상생방송 공식 홈페이지와 YOUTUBE 상생방송 채널을 통해 다시보기 할 수 있다.

 

 

정나라 기자  singleorig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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