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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이문영,장신의 환단고기,이유립 매도에 대한 비판이문영의 뉴스톱 기사 "이유립은 왜 <환단고기> 편찬자로 계연수를 내세웠을까"에 대한 비판 (2020.07.29)


환단고기 사료가치와 진서 근거는 살펴본바 내용상 수백가지가 된다.  중국과 일본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천문학 등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환단고기를 검증할 수 있다.  

그러자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 1911년 초간본이 현재 없다는 이유로 환단고기 발간 과정과 이유립 선생등 저자에 대한 신뢰성 등을 부각하여 대중들이 환단고기 자체를 보지 못하도록 매도하고 있다. 

뉴스톱 홈페이지 메인화면 (이문명의 기사를 당일 메인으로 띄워주고 있다)

7월 29일 소설가 이문영씨는 뉴스톱에 기사를 하나 올렸다. 이유립은 왜 환단고기 편찬자로 계연수를 내세웠을까라는 황당한 제목의 칼럼이다. 마치 이유립 선생이 조작극을 벌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이 칼럼의 내용은 장신의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장신과 이문영 이 두사람의 합작으로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은 이유립 선생을 희대 사기극의 주인공처럼 그려놓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한다. 

해학 이기선생, 운초 계연수 선생, 이유립 선생 (좌측부터)

뉴스톱의 칼럼을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을 먼저 싣고 이에 대한 팩트체크를 그 다음에 정리하는 식으로 답변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문영 주장]▶▶그동안 계연수의 실존성에 대한 의문은 있었는데 이유립이 왜 계연수라는 인물을 내세웠는지에 대한 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그의 아버지 이관집 등이 아니라 계연수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Fact] --> 내세운게 아니라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편찬한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환단고기를 낸 것이다. 그들이 단정지은 결론으로 몰아가는 기사일뿐이다.

[이문영 주장]▶▶ 계연수는 이후 잊힌 상태였다가 이유립에 의해서 다시 등장한다

[Fact] --> 계연수는 잊혀지지 않았다. 1920년 정신철학통편부터 밝힌바 계연수 선생은 여러 문헌을 통해서 실존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실존인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조되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인정하고 시작하자. 계연수 선생은 실존인물이다.  분명히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연구해보면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나 일제와 밀정에 희생당하여 이름없이 살다간 독립투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을 허구의 인물로 지금까지 몰아붙여왔다. 명백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체가 다 드러나지 않고 이후에 차츰 한 인물의 여러 활동이 드러났다고 하여 이후에 조작,첨삭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나중에 활동 전반이 드러나는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폄하해야하는가를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천부경을 쓰고 수첩에 넣고 다녔던 독립운동가들이 다수다. 대종교(단군교) 독립운동가들을 통해서 천부경은 계속 알려져왔다. 해방후 부통령까지 맡았던 이시영 선생이 1934년에  그릇된 관점으로 중국인이 쓴 역사책에 반박하기 위해서 쓴 『감시만어』에서 천부경과 계연수 선생을 언급했다. 그것은 계연수라는 인물은 30년대에도 잊혀지지 않고 계속 인구에 회자되었다 혹은 어느정도는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이후 40년대,50년대가 마찬가지다. 

[참고 기사 자료]
1930년대 대종교 ‘천부경’ 발견 <북 신문> 2020.03.28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699 

1934년 이시영 선생은 천부경과 계연수를 언급했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17 

1942년 영변지(寧邊誌)에 실린 천부경과 계연수 선생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33 

계봉우 <조선문학사> (1950)에 나온 천부경과 운초 계연수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52

계연수 선생이 실존인물임을 드러낸 100년전 문헌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4996 


[이문영 주장]▶▶ <천부경> 발견의 공을 고성 이씨 가문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이태집(이유립의 숙부)이라는 인물을 끼워넣었다.

[Fact]  -->  그대로다. 계연수,이태집 두분이 함께 묘향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늦게 전말이 드러난 것 뿐이다. 이런 주장은 고성이씨 가문을 그런 식으로 가짜 공덕을 만드는 짓이나 하는 가문으로 비하하는 것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등 안동의 고성이씨 가문 뿐 아니라 평안북도 삭주지역의 고성이씨 독립운동가들도 무장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 바로 평북 삭주지역이다. 게다가 행촌이암,일십당 이맥, 석주 이상룡 까지 모두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역사학자였거나 거기에 준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천부경 발견의 공을 추가하기 위해서 끼워넣었다고? 말이 안된다. 

 "단기 4250년에 와서 운초거사(雲樵居士) 계연수(桂延壽)와 국은(菊隱) 이태집(李泰楫) 두 분이 영변 묘향산에 들어가 영약을 캐려다니다가 우연히 심학절벽(深壑絶壁)에 유각(留刻)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커발한 1965년 3월호)

 이런 부분이 뒤늦게 주장되었다고 해서 끼어붙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태집 등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증언이 조카인 이유립 선생에게 전해진 것이고 이를 해방후에 정착하고 안정을 찾은 후에 잡지를 발간하면서 정리를 한 것이다.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역사가 정리가 된 책들이 나오는 것이 1960년대 초반이다. 계속해서 독립운동은 발굴되고 있는 시기다. 이를 끼워넣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삐딱하게 ,조작했을 것이라는 추정에다가 껴맞춘 단정에 불과하다. 

[이문영 주장]▶▶ 1898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를 간행했다고 적혀있기도 했다.....<환단고기> 안에는 <태백일사>가 들어있다. 이유립이 나중에 이름을 고친 것이다....1971년에 이유립은 <환단휘기>라는 것을 간행했는데 여기에 계연수가 쓴 발문이 실려있다. 이 발문에서 계연수는 1898년에 <태백일사>를 간행한 것으로 적었다....해동인물지에 태백유사. 커발한에 태백유사라고 나온다. 

[Fact]  -->  1897년에 계연수 선생은 해학 이기 선생을 처음 만난다. 다음해에는 이기 선생에게서 책을 전해받고 그 책을 간행한다. 그 책이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이다.  <태백유사>가 <태백일사>다.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다.  커발한이나 자유지 등은 잡지다. 커발한의 경우도 일년에 몇번 나오는 월간지도 아니고 계간지 정도다. 여기에 조금씩 부분적으로 낸 것을  태백일사가 아닌 다른 명칭을 붙일수 있는 것이다. 위서론자는 조금이라도 틀린 부분이 있으면 꼬투리를 잡으려 할 뿐이다. <태백일사>를 제대로 읽어본적이나 있는가?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보면 대진국(발해)에 관한 우리 역사가 확연히 정리가 된다. 태백일사를 통해서만이 발해의 역사와 발해 황제의 연호가 정리된다. 이런 검증받은 기록들이 환국본기부터 고려국본기까지 가득하다.  그저 몇가지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이 생기면 그거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은 못보게 되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보기를 바란다.  

[이문영 주장]▶▶1973년에 이유립이 낸 <광개토성릉비문역주>에서 또 새로운 계연수의 행적이 추가되었다. 

[Fact]  --> 비문징실의 내용은 광개토태왕비문의 진실을 드러낸다. 계연수 선생은 두번에 걸친 답사를 거쳐서 이 비문의 결락자 139자를 찾아내어 발표한다. 이는 우리민족에게는 빛과 같은 소식이다. 
1930년 당시 24살 청년이었던 이유립은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삼육사의 실재성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에 삼육사 창립에 관한 내용이 장문으로 실려 있는 것이다. 지금은 신문의 옛 기록을 검색할 수 있지만 이유립 선생 당대에는 컴퓨터는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것조차 알 수 없는 시절이다. 이는 삼육사 단체 조직에 대한 이유립 선생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유립 선생의 일제시대 전반에 관한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1930년대 삼육사를 통해서 한번 발표를 했다가 이를 빌미로 하여 폐간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에 73년에 이를 다시 출간한 것이다. 전혀 문제가 없다. 

[이문영 주장]▶▶<천부경> 유래가 <환단고기> 내용과 충돌하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계연수가 1916년에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묘향산에 석각을 한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꺼냈다.

[Fact]  --> 천부경의 유래는 환단고기와 충돌하지 않는다. 1911년에 출간한 환단고기에는 천부경이 들어가 있고 이미 계연수 선생은 천부경을 알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다는 내용은 단탁의 계연수 편지(기서)에도 드러난다. 한문해석의 오류를 다시 짚어보기 바란다. 
단군교 기관지 『단탁』 창간호 (1921년 11월) 

첫문장을 해석하면 이렇다 " 제(계연수)가 일찍이 스승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약초캐는 것만 강조하는데 중요한 것은 계연수 선생은 스승이 있었다. 해학 이기선생이다.  천부경의 내용과 철학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천부경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고 있으니 보았을때 무엇인지 알았고 찾아낸 것이다. 

또한 1920년 정신철학통편에는 윤효정이 천부경을 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윤효정은 환단고기 감수자이자 계연수의 스승인 해학 이기선생과 대한자강회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는 1906년 4월 설립된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윤효정과 해학 이기 선생은 대한자강회 편집위원이었다. 
"대한자강회 월보의 편찬을 위해 월보 편집협찬위원으로 장지연, 윤효정, 정운복, 이기, 현은, 양홍묵, 여병현, 남궁훈, 임병환, 박은식 10명을 공선하였다" (우리 역사넷)

계연수,윤효정,전병훈(정신철학통편 저자)

계연수 선생도 자강회 회원이었으나 이부분을 차치하고라도 윤효정과 이기의 관계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통해서도 천부경이 전해지는 과정, 계연수와 스승 해학이기의 관계 등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해학 이기 선생이 환단고기를 감수했음은 이미 증명된바 있다. 

해학 이기의 환단고기 감수 입증하는 『환단고기』등사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32 

해학이기 선생 , 환단고기 감수 확실시 : 행촌 이암의 저서 『태백진훈』에 주석을 단 해학 이기 문헌 발굴이 갖는 중요한 의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22

[이문영 주장]▶▶<환단고기>는 1911년에 나왔는데 이미 <천부경>이 실려있었다. 그런데 1916년에 <천부경>을 처음 발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계연수가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날조했던 것이다. 이것은 1965년에 나온 <커발한>과도 충돌하는데, 이유립은 이런 것을 후대에 꼼꼼히 대조 확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후에도 <천부경> 계연수 각서설은 이유립이 여러차례 강조한 바 있다.

-->  이렇게 꼬투리를 잡으려고 득달같이달려드는 세력이 있을 지는, 이정도로 환단고기의 내용을 보지도 않고 저자를 매도할지는 몰랐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식민사관에 경도되어 일본과 중국에 이용당하는 세력들이 잔존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문영 주장]▶▶ 1976년에 나온 <커발한문화사상사> 1권에는 단단학회 간부 조영주의 ‘환웅천왕 소상의 유래’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여기에 이덕수의 회고록에 나온다고 하면서 1898년에 계연수 대승정이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포함한 <환단고기>를 간행했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러나 잘 알려진 것과 같이 1979년에 <환단고기>가 광오이해사에서 출판되면서 이 책의 간행일은 1911년으로 정정되었다.

[Fact]  -->  <단군세기>, <태백일사>등이 있어서 이를 합본하여 환단고기로 편찬하려는 시도나 초벌 정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추정하면 된다. 삼성기 상하,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를 모아서 하나로 편집하는 과정이다. 그게 그냥 뽄드로 5권을 붙이는 작업이 아니다. 엮어서 한권으로 간행하는 과정에서 정리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을 뿐이다. 이를 가지고 1898년에 환단고기가 있었으니 1911년은 시간을 바꾼 것이라는 것도 철저한 매도다.  이기 선생을 만나고 나서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서 완벽하게 정리가 되고 1909년 이전에 이기선생이 감수를 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편집하면서 1911년에 환단고기 초간본이 발간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이문영 주장]▶▶이유립의 주장에 따르면 계연수는 상당한 거물 독립운동가인데 당시 기록들에는 감연극의 악행이 소상히 전하고 있다. 계연수가 정말 거물 독립운동가였다면 감연극의 혁혁한 전공에 그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Fact]  -->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퉁치고 어물쩡 넘어가는 것은 여전하다. 밀정 '감연극'에 대한 여러 기록은 최근에야 발견되었다. 이는 계연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주장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감연극'이라는 이름이 발견되니 그당시 삭주에 있었던 악명높은 밀정 감영극을 가지고 조작했다는 쪽으로 모든 것은 그저 모든 것을 맞추어놓고 껴맞추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굳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조작할 이유가 없다. 지금 이문영과 장신 등은 이유립 선생을 "희대의 전무후무한 독립운동사 조작,왜곡자"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가끔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서 후손 주장을 하다가 걸리는 경우는 있어도 아무리 비양심이라도 독립운동의 행적과 역사를 이렇게 광범위하게 모조리 조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도 독립운동에 엄청난 기여를 한 고성이씨 가문에서 말이다.

계연수 선생 살해한 감영극 실체 드러나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13 

밀정 감영극이 계연수 포함 단학회원들을 공격했음이 밝혀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84

이 기사에서 감영극이 공격한  '명창하'는 이유립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단학회원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내용이 발굴되어서 세상에 드러난 것은 2020년이다. 이유립 선생은 어떻게 명창하라는 인물을 알고 '감영극'이라는 인물을 알아서 감영극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명창하를 '단학회 관동분회 총무'라고 조직도에 적어놓을 수 있을까?  우연도 계속되면 필연이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모든 게 없었고 정보도 없었던 60년대,70년대에 이런 것들을 짜맞추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터무니없이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유립 부친 이관집 선생에 관한 부분>

[이문영 주장]▶▶이유립 아버지 이관집은 왜 환단고기 편찬 관련 뒷선으로 물러났나

[Fact]  →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편찬을 한 것이지 이관집 선생이 환단고기를 편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연수 선생이 쓴 발문에 이관집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문영 주장]▶▶ 행장이 실린 때는 계연수 날조극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1898년에 광개토대왕비를 답사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실려있지 않다.

[Fact]  → '날조극'이라고 단정지어서 대중들을 기만하고 있다. 연대별로 모든 행적을 다 기술하지 못할 수 있고 누락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행장을 이유립 선생이 쓴 것이 아니다. 이유립이 썼다는 근거를 대기 바란다. 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의 행장 글을 쓴다는 근거는 없다. 

[이문영 주장]▶▶  1918년 11월 이후에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을 만나 고종의 복위를 의논했다. 이상설은 1917년에 러시아에서 죽었으므로 그는 유령을 만났던 모양이다. 

[Fact]  → 잘못 기술된 부분이다. 이는 오류이거나 착오라고 보면 된다. 만약 조작을 할려고 했으면 주장한대로 죽은 연대나 이런 것을 오히려 맞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들은 이야기를 기술하는 것이기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1918년이라는 연대가 오류이고 실제로 이상설을 만났을 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고 검토해봐야 한다. 

[이문영 주장]▶▶이관집은 왕정복고를 하고 싶었던 1947년 유언을 남기길 일본에 있는 영왕을 옹립하여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라고 했다.

[Fact]  → 이관집 선생이 왕정복고를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했다는 것은 그가 일제시대를 반일항일행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이유립 선생에게 이를 유언했다는 것은 그의 아들 이유립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것만으로도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친일파 자식에게 왕정복고에 힘쓰라고 하지는 않을거 아닌가?  그들이 몰아붙이는 친일파였다면 어떠했을까? 친일했던 사람들이 해방후에는 친미로 돌아섰다. 한번 다른 나라에 붙은 사람은 그러기 쉽상이다. 반탁을 주장하며 대한제국 황제국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오히려 일제시대를 관통해온 올곧은 황제에 대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유언이다. 이것이 잘못인가?  

[이문영 주장]▶▶이관집의 행장을 살펴보면 계연수는 물론 단학회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립이 1965년 단단학회 즉 태백교를 만들던 때까지는 계연수나 단학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Fact]  → 행장에 꼭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의 기술자가 이유립 선생이 쓴 것이어도 기술이 안될 수도 있는 것인데 이유립 선생이 쓴 것이 아닐진데 단학회가 써있지 않을 수 있다. 현재도 독립운동 당시의 단체가 모두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다. 단학회는 단순하게 만들어졌다는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학회 간부의 명단이 있으며 단학회 지역 조직도가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명단은 거의 100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나오며 반정도는 독립운동가로 검색되어서 나온다. 이들의 실존과 행적을 조사해보면 단학회가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단학회는 이유립 선생만 그 존재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가인 오봉록 지사가 천마산대 활동을 하면서 천마산대에 대해서 증언한 내용을 보면 3대 단학회장이 천마산대 대장 최시흥임이 나온다. 게다가 동생 최시찬이 단학회 재정보조에 주력했다는 내용까지 증언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도 단학회가 2대회장,1대 회장이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단학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을 보면 단학회가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오봉록 지사가 증언한 최시흥과 그 동생 최시찬을 보자. 

최시흥 : 의주출신 후에 삭주 구곡면 신풍리로 이주, 단학회 3대 회장. 3.1 독립선언 직후 박응백 등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여 천마산대를 조직, 그 사령장에 취임.1924년 12월 평양 감옥에서 옥사햇다. 

최시찬 최시흥 사령장의 아우, 무계급 대원으로 종군하여 단학회의 재정보조에 주력 (오봉록 지사 증언 ,삭주군지)

오봉록 지사의 최시찬 증언이 왜 맞을 수 밖에 없는지 살펴보자. 한국사데이터비에스를 통해서 최시찬(崔時贊) 을 검색하여 조선총독부의 <용의조선인 명단>에 있음을 확인한다. -> 여기서 최오산(崔午山)이라는 이명이 있음을 확인한다.  -> 최시찬이 아니라 최오산(崔午山)을 공훈전자사료관을 통해서 검색한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가 확인된다 --> 천마산대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이 확인된다. (이는 최시찬을 검색해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게다가 최오산만으로는 최오산이 최시흥 동생이라는 중요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즉 오봉록 지사의 증언이 아니면 이 연결고리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최시찬 검색 화면

오봉록 지사의 천마산대 독립운동 증언이 확실함을 최시흥 동생 최시찬을 통해서 알게 된다. 최시찬으로는 검색해서 얻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최오산'이라는 이명이 있다는 것이 용의조선인명단에서 나온다용의조선인명단에서 얻은 '이명'이 없었다면 최시찬이 무엇을 한 인물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봉록 지사의 증언이 정확히 맞다는 것을 반증한다. 결국 최시찬이 형의 단학회 3대 회장활동을 도왔다는 내용이 맞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단학회 1대,2대 회장이 있다는 것도 증명이 된다. 이를 반론할 수 있으면 해보라.

단학회 재정에 주력한 천마산대 최시흥 장군 동생 최시찬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25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의 단학회 증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46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의 천마산대 증언의 의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44 
 

단학회를 부정하려면 이제 정부로부터 공인받은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를 부정해야한다. 그가 증언안 60여명의 천마산대 대원을 통해서 독립운동가 오봉록의 근거가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부정할 수 있는지 최선을 다해 조사해보라.

[이문영 주장]▶▶단단학회의 전신으로 단학회를 설정했다.

[Fact]  → 설정이 아니라 단학회가 원래부터 있었다. 해학이기,운초 계연수 선생 등이 창립했다. 이는 위와 같이 입증된다. 

[이문영 주장]▶▶이유립은 1960년대 단단학회(태백교)를 만들면서 교리와 역사를 창조해냈다. 단단학회의 전신으로 단학회를 설정했다. 종교에서 자신의 가문을 신성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이암, 이맥, 이기로 신성 혈통을 설정했는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이기를 단학회 초대회장으로 한 이상 그 적통은 아버지 이관집에서 자신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았겠지만 이관집은 세상이 다 아는 부황보국론자에 유교도였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왕정복고를 꾀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왕정을 다시 세운다는 복벽론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따라 천부경의 발견자로 알려졌지만 세부 사항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계연수를 내세우게 되었다. 아버지 대신이었던 것이다. 계연수는 아무 세부사항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약점도 없었다.

[Fact]  → 설정이 아니라 단학회가 원래 있었다. 이유립 선생은 단학회 6대 회장이자 마지막 회장이다. 이는 위의 답변에서와 같이 입증된다. 간부들의 명단과 조직도에 나오는 지역별 단학회 임원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이는 조작할 수 없는 사실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저들에게 좋은 논리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썼다. 소설가라서 이런 소설을 쓴 것이다. 말이 안된다. 고성이씨에 대한 모욕이다. 고성이씨가 모든 것을 지어냈다는 것은 실로 고성이씨 가문을 쓰레기로 모는 행위다. 알다시피 고성이씨는 항일항쟁에 가장 힘쓴 가문중의 하나다. 무장항쟁에도 앞장섰다. 삭주로 이주해간 고성이씨들은 대부분 가장 치열한 항일항쟁에 나섰다. 이유립 친족들 외에도 대부분의 고성이씨들은 항일항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이런 말도 안되는 소설을 언제까지 들어주고 허용해야하는 것인가? 

<홍범도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도 환단고기에 이용한 이유립>    부분

[이문영 주장]▶▶오동진의 경우 1898년 광개토왕비 답사 때 50금을 지원했다고 나오는데, 이때 오동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Fact]  → 열살은 지금은 열살과 다르다. 게다가 오동진을 똑같은 어린이로 볼 수 없다. 삭주 삼일운동의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6세 아이들도 부모따라 시위참석하던 때였다. 동학운동때는 5세동이(실제 7세 정도)가 지휘를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어린이를 보는 잣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항일무장항쟁도 보면 천마산대나 남만주 항쟁에도 13세,14세도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그가 50금을 낼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추정일뿐이다. 

[이문영 주장]▶▶ 오동진은 1889년생인데 1865년생인 줄 알고 있었다. 오동진의 고향도 잘못 쓰고 있다. 오동진에 대해서 기초적인 사실 관계도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Fact]  → 1865년(乙丑년) , 1889년(己丑년) 乙와 己의 착오가 있었을 뿐이다. 오동진은 이유립 선생의 아버지 "이관집 선생을 잘 따랐다"고 하는데 1살차이로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 게다가 '오군동진'이라고 되어있다.  1살 차이에 '오군'이라고 쓸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이는 己丑년을 乙丑년으로 착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출생년이 24살이나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가서 알아본 곳은 오동진의 아버지의 고향이다. 만주에서 잡힐때 당시 가족들이 살고 있었던 집을 찾아간 것이지 오동진이 태어난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다. 이유립 선생이 말한 오동진의 고향이 맞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거기나 거기나 모두 멀지 않은 지역이다. 삭주에서 의주 우리가 지금은 걷기에 멀어보이는 지역도 당대에는 다 멀리까지 걸어서 통교하는 거리다. 

[이문영 주장]▶▶ 그리고 오동진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단군 신앙을 섬기는 단학회 회원이 될 까닭이 없다. 

[Fact]  → 그리고 단학회를 현재의 종교단체 개념으로 보면 안된다. 당시 독립운동가는 여기저기의 계몽단체에 다 가입되어있었다. 독립운동에 보탬이 된다면 어느 단체라도 가입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무지에서 비롯된다안창호 선생은 독실하지 않아서 단군을 공경하고 숭상하고 단군 칭송 노래를 6절까지 지어서 썼을까? 이승만 박사는 독실하지 않아서 1921년 단군 어천절에 참석하며 찬가를 읽어내려갔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지금처럼 기독교가 배타성을 띠지 않았다가 정답이다. 특히나 독립운동을 하는 그들에게는 말이다. 게다가 1920년대까지 기독교 하나님의 호칭은 '하나님'만이 아니었다. '상제님'이라고 한 것이다. 안창호 선생도 삼일운동을 "상제님이 허하신날"이라고 칭했다. 

만국 부인 기도회 사건(萬國婦人祈禱會事件 1941년)의 기도회 순서 제목을 보면 "기도라는 것은 상제님께 빈다는 뜻. 모든 사람과 사회와 국가와 세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뜻. '상제'의 뜻이 모든 사람 생활에 있어서 성취되기를 기도할 것."이라고 나온다. 40년대에도 하나님의 호칭은  '상제'다. 하나님만이 기독교 용어가 아니었다. 

단학회는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면서도 '삼신일체상제'를 주벽으로 하여 천제를 모셨다Main은 상제다. 이는 당대 기독교 신관의 하나님 호칭과도 부합하는 면이 많았다. 이런 것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오동진 장군이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신념으로 단학회의 간부를 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게 안했다고 단언할 여지는 전혀 없다. 

[이문영 주장]▶▶ 단단학회 측은 오동진이 이관집과 의논해서 3.1운동에 참가했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오동진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의주서교회 담임목사 유여대의 전갈로 3.1운동에 참여했다.

[Fact]  → 『삭주삼일록』을 보면 4월 7일(음력 3월 7일) 삭주의 독립운동에 관한 아주 디테일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만세시위가 있기전에 "김석기.이양보는 유립에게,최석형은 청년계에게 모의하고,장찬진,이응우,김찬정은 야소교와 모의하고 홍석호,김복익은 천도교와 도모하고 이봉우,최지흥은 향신들과 모의하고 이장청은 부녀계와 이용담은 농상계와" 등 구체적인 인물과 구체적인 지역별 계획등이 나오고 있다. 다시말하지만 굳이 이런 내용을 꾸밀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 내용은 보훈처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저들의 주장은 이유립 선생이 삼일운동 스토리부터 해서 해방전 모든 자신과 친족과 주변의 독립운동을 지어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한 인간을 희대의 조작자로 몰아가고 있을 수 없는 비양심의 소유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고도 남는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문영 주장]▶▶ 홍범도 관련도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홍범도가 1911년 5월에 <환단고기>를 간행하는데도 자금을 지원했으며 1918년에 단학회 고문이 되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10년 5월 연해주로 이동했다. 1911년 3월에는 함경북도 경원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11년 1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1의형제동맹을 결성했다. 이후에도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다가 1919년 9월에서야 북간도로 무장병력과 함께 이동했다. 그가 이렇게 두만강 쪽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압록강 쪽의 삭주나 관전현 쪽의 일에 관여할 수 있었겠는가. 홍범도의 숱한 기록들에 단학회가 등장하는 일도 없다.

[Fact]  →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왜곡되어있었다. 최운산 삼형제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은 사비를 들여 체코군단에서 대량의 무기를 구매하고 군량과 의복을 자체 조달해 봉오동전투 승리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런 사실은 최근의 봉오동 영화에서도 없었다. 역사학계가 침묵하니 그 후손이 나와서 주장을 해서 지금 조금씩 사실이 추가되고 있는 중이다. 해방후 70여년이 지난 지금이서야 말이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어찌 자부하는가? 3대 단학회장 천마산대 최시형 장군도 삭주지역 그리고 압록강 그위의 남만주뿐 아니라 두만강 지역에서도 활약하고 왔다. 

"최시흥(1889~1925.3)은 188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다.  최시흥은 3.1 운동이 전개되자 의주군 고령삭면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뒤 만주로 넘어가 류하현 삼원보에서 수명의 동지와 하얼삔으로 가 그곳의 노농병에 가입 활동하다가 이해(1919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귀국, 천마산대를 조직하고 1920년 3월부터 활동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독립신문 158호 , 1923년 3월 14일)

최시흥 장군과 오동진 장군의 사진이다. 오동진의 광복군 총영에 천마산대가 소속되어있었던 것 그리고 최시흥 장군과 오동진 장군이 밀접한 관계인점을 감안해도 오동진이 단학회 활동을 했을 개연성은 아주 높다. 

그들도 계속 거주를 이동할 수 있고 활동 반경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봉오동전투 100주년, 홍범도 장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https://news.v.daum.net/v/20200708030022505 

도올아인 오방간다’ 김용옥, 홍범도 편지에 눈물 쏟아 “독립운동 영웅”
 http://www.slist.kr/news/articleView.html?idxno=68490  “내 생각에 홍범도는 절대 무식하지 않다”면서 “내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국립극동역사문서보관소에서 홍범도의 편지를 보고 눈물을 쏟았다. 어려웠던 시절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독립운동 자금을 보탠다는 내용이라며 홍범도의 강직함을 강조했다.

위 내용에 보듯이 홍범도는 일자무식도 아니었고 그가 남긴 편지에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독립운동 자금을 보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홍범도가 자금을 대는 내용이다. 환단고기에도 자금을 댔을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다. 자금을 댄 연대가 나와 있지 않은 마당에 꼭 출간 직전에 댔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 이른 시점에서 자금을 댔을 가능성도 있으며 류인석 장군에게 보내는 것처럼 자금을 우편으로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문영 주장]▶▶  이외에도 그야말로 유명하다싶으면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닿은 것으로 마구잡이로 주장하는데 사실은 하나하나 검증할 필요도 없다. 

[Fact]  → 말이 안되는 글이다.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숱하게 단학회 명단에 정리되어있다. "사실은 하나하나 검증할 필요도 없다. "라는 말은 검증하면 드러나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다홍범도,오동진 검증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면 단학회 독립운동가 명단들을 하나하나 검증해보라. 그러면 진실이 드러난다. 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드러나는 가? 이들을 모두 거짓으로 정리해서 집어넣었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단학회 자강도 지역 분회 활동를 분석해보니...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30

단학회 간부 명단, 독립운동 연구 가치 높아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7

단학회, 지역별 조직으로 운영했음이 드러나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87 

독립신문 1923년 1월 1일(제150호) , 1922년 12월 12일까지 의연금을 내 도움을 준 사람 명단

[Fact]  → 독립신문 1923년 1월 1일자에 보면 22년 12월 12일까지 도움을 준 명단을 적어놓고 있다. 이 독립신문에 단학회 간사와 지역임원인 주건원,이유항,김태연 등이 나란히 명단에 나와 있다. 이는 단학회 간부 명단이 사실임을 드러낸다. 이유항은 이유립 사촌이다. 사촌 이름 옆에 단학회 명단이 앞뒤로 들어있다. 이런 것을 보고 위서론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단하나. 이유립이 독립신문 23년 1월 1일자를 보고서 명단추출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그렇게 그들 논리를 껴맞추는데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예를 든것에 불과하다. 모든 명단을 전수조사해보라. 단학회의 독립운동의 실체만 드러날 뿐이다. 

[이문영 주장]▶▶<환단고기>의 허구성은 이미 수없이 많은 논문이 증명한 바 있으며 그에 수반되어 나온 이야기들도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 관계가 죄다 틀렸다.

[Fact]  → 환단고기의 실증,검증은 이미 수없이 많은 논문이 증명하고 있다. 왜 그것은 언급하지 않나? 죄다 틀렸다는 말은 소설에 불과하다. 이들의 날조극에 휘둘리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이문영과 장신 씨는 이제까지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하다하다 이제는 이유립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사기꾼과 중상모략을 하는 날조극의 연출자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증언하고 주장한 단학회와 고성이씨의 역사광복운동과 항일항쟁을 전면 부정하여 고성이씨 가문의 역사운동과 독립운동을 날조된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이문영,장신씨의 주장은 위에서와 같이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학술을 빙자하여 한 인물을 완전히 사기꾼으로 몰아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가려는 얄팍한 수작을 이제는 버리기를 바란다. 21세기 시민역사학 시대에는 누구나 찾아보면 진위를 가늠할 수 있는 시대다. 어리석은 비난을 그만두고 진정으로 반성하고 이유립 선생과 고성이씨 가문에 사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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