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笠, 1907~1986.4.18)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40주기가 되었다. 이유립을 논함에 있어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스승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로부터 전수받은 이 사서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한국인의 역사 인식을 반도 내의 지엽적인 수준에서 대륙과 태고 시대를 아우르는 광활한 지평으로 확장시켰다. 그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망국의 어둠 속에서 국통(國統)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했던 한 지식인의 처절한 투쟁기이자,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해 바친 고독한 80년의 여정이었다.
이유립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가 겪은 수난과 갈등, 그리고 극복의 서사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철성 이씨(고성 이씨)
철성 이씨(고성 이씨) 35세손인 이유립 선생은 이른바 애국 명문거족의 후손이시다. 시조 이황李璜을 거쳐 9세손이 바로「단군세기」의 저자 행촌이암 선생이고 13세가「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선생이시며 27세가 운초 계연수의 스승, 이기李沂선생이시다. 30세손 이상룡 선생은 상해 임시정무 국무령을 지냈다. 이처럼 그의 족보에는 일찍이 나라에 나아가 충성을 바치며 나라를 지키고 참된 국사를 수호한 애국지사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또한 일제 시대 때는 일제와 치열하게 맞서며 구국투쟁에 헌신한 선현들이 많다. 왜곡된 시야가 만연한 작금의 세상에 환단고기를 내놓고 그것을 지켜온 삶은 그처럼 뜨거운 애국의 혼이 흐르는 조상의 후손으로서 태어난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아버지 단해 이관집
이유립의 정체성은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내려온 가문의 항일 전통과 학문적 토양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 이관집은 고종(高宗) 즉위 3년인 병인년(1866년) 10월 2일에 정곡리(井谷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관집(李觀楫)은 구한말의 혼란기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관집은 조국의 주권이 찬탈당한 것에 대해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자강회(自强會)'를 설립하였다.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애국계몽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이유립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이러한 구국 활동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투철한 민족 의식을 체득하게 되었다.
망국의 어둠 속에서 국통을 지키다 – 단해 이관집과 환단고기의 정신 계승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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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의 출생
이유립은 1907년 12월 18일(음력 11월 14일),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에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관집(李觀楫)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이유립은 부친이 설립한 한학 교육 기관인 구성재(求誠齋)에서 전통 한학을 수학하며 유교적 소양을 닦았다. 이 시기 그가 접한 위정척사 계열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유교적 대의명분론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1911년 계연수, 환단고기 초간본 발간하다
평생을 환단역사 복원을 위해 일로매진한 계연수 선생이 천 년에 걸쳐 다섯 사람이 쓴 책을 1911년에 합본하여 『환단고기』를 출간하였다.
▶ 1912년 이유립 6세때 일화
3살때 어머니 태인 백씨에게 천자문을 배운 이유립은 특히 6세 때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의 원수인데 "~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을 싫다 하여 끝내 [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관의 출발점이었다.
▶1914년 천마산 제천혈맹 (부친 이관집, 삼촌 이태집 등 참석)
광무 18년(1914) 갑인 3월 16일에 단해 이관집, 석천 최시흥, 송암 오동진, 백하 김효운, 벽산 이덕수, 일봉 박응백, 창춘 양승우, 직송 이용담, 국은 이태집, 녹수 서청산, 백주 백형규 등 12선인과 더불어 삭주 천마산에서 제천혈맹을 거행했다. 이날 평안북도 천마산 성인당에 모여 삼신의 주벽 하에 삼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면서 단학회의 기본 대책을 토의했다고 전한다. / 송암 오동진에게 노래를 배우고 조련 실습을 받음.
▶1914년 환단고기 초간본 1권을 소유한 이고선 단서대강 집필시작
심당 이고선은 9세 때인 1914년부터 단서대강의 집필을 시작하였고, 1965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1970년대 후반에 이유립에 의해 창작된 위작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단서대강』 의 환국・배달・조선 관련 내용 중 약 2/3가 환단고기와의 연관성을 보인다는 점도 주목된다
‘심당전서’가 증명하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 학계 이목 집중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99
▶ 1915년 2차 제천혈맹 (or 1918년)
명년(1915년) 백암 홍범도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은 벽산 이덕수의 소개로 참가하였으며 그해 10월 개천절에 박응룡, 정창화, 박용담, 김병주, 이용준, 이봉우, 허기호, 신찬정, 이양보, 주상옥, 이동규, 김석규, 손영린, 이진무 등 14명이 추가로 취지문에 서명하게 되어 회원이 5만여 명에 달했다.
▶ 1918년 10월 배달의숙 설립 (오동진,이상룡,계연수)
만주 관전현 홍석랍자구紅石拉子區 홍석령 산하에 단학회를 이설하고 배달의숙을 열었으며 <단학회보>를 발간하였다.(<커발한 제14호> 1968.9.1)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관전현에 민족학교 ‘배달의숙’을 설립했다. 그 비용(단학회보)은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 선생이 보조했고 광복군 제1영 사령장 오동진 장군이 교당과 전토를 사서 기증했다. (『대배달민족사』「5권」 40쪽) 이 배달의숙에서 오동진, 계연수, 최시흥 등이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역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다. 그 학생중에는 아버지 이관집을 따라온 이유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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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삭주 만세시위 참여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13세의 소년이었던 이유립은 신안동 일대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며 민족적 격동을 직접 체험하였다
"4월 7일 신안동 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형의 틈에 끼어 참가했고 노래도 지어부르며 때로는 5,6살 되는 동네 아이들에게 엿이나 알사탕을 사주면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산과 골을 돌게 하였다. 그 머리는 6세동 손영린의 아들이었다." (이유립평전 144쪽)
[4월 7일 삭주 의거] 이관집이 주도한 삭주 3.1 운동: 치밀한 준비와 격렬한 저항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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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조선독립소년단,천마산대 통신원 활동
아버지 단해 이관집 선생을 따라 단학회가 주관하는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최시흥,오동진 등 선학들의 강의를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하여 단장이 되었다. 배달의숙에서 선생은 낮에는 역사 강론과 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천마산대가 조직되자 통신원으로 활약하여 독립 단체간 연락을 맡는 등 3년 간학문과 훈련과 투쟁을 병행하였다.
정산에게 학문을 전수한 스승은 부친 단해와 진중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벽산 이덕수과 송암 오동진이었다. 그리고 유년시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고유 학문을 권하던 운초 계연수와 배달의숙에서 만난 단재 신채호의 학풍을 쫓아 그들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 14세에는 천마산대 소년통신원으로 전봉천과 함께 통신연락을 도왔다.
천마산대 출신의 오봉록(吳鳳碌, 1902∼1981)은 1977년 4월에 천마산대 대원의 이름과 활동을 기록하여 『삭주군지』에 실었다. 총 66명의 명단에 마지막으로 이유암(李裕岩 *李裕笠의 誤記)을 소개하면서 “삭주군 출신. 나이가 어려 천마산대의 통신원으로 활동했다”고 썼다.’ *朔州郡民會, 『朔州郡誌』, 1991, 66∼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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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주군지』에 이유립 천마산대 활동 적혀 있어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81
[발굴]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의 단학회 증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46
[발굴]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의 천마산대 증언의 의미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44
▶1920년 스승 계연수 선생, 일제와 밀정에게 살해당하다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스승 계연수 선생의 순국이었다. 계연수로부터 “역사를 공부해보라”는 말을 들은 지 불과 며칠 뒤, 참혹하게 살해된 시신을 목격한 경험은 그에게 역사 연구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위순사감독 감연극(一云 감영극)이란 자가 “조선역사를 고취하는 놈은 일본제국 대동방평화정책에 방해하는 것이니 모두 빨리 잡아없애야 한다”하여 기어코 밀정을 홍성납자(紅石拉子)에 보내여 운초 선생을 암살하고 말았다. 이때가 단기 4253년 8월 15일이었다”
계연수 선생 살해한 감영극 실체 드러나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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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수 사후, 단학회는 3대 최시흥에게로 계승되었다. 천마산대의 최시흥 장군이 제3대 단학회장에 올랐으며, 그의 동생 최시찬은 단학회의 재정 지원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의 천마산대 관련 증언을 바탕으로 『삭주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최시찬 : 최시흥 사령장의 아우, 무계급 대원으로 종군하여 단학회의 재정보조에 주력 (오봉록 지사 증언 ,삭주군지)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25
1922년 최시흥 장군은 일경의 포위가 좁혀지자 대원들을 안전하게 만주로 이동시키고 뒤이어 만주로 가던 도중 중국 관헌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된 선생은 법정에서도 재판관을 준엄하게 꾸짖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1925년 3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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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최시흥 장군이 감옥에 갇히자 이덕수 선생이 4대 단학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덕수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주에서는 의민사(義民社)를 조직하여 사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한족회 민사부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의 부관으로도 일하였다. 1920년에는 벽산대(碧山隊)를 조직하여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양승우(楊承雨)와 같이 벽창(碧昌) 청년의용대를 조직하여 총지휘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에는 양승우와 함께 창성(昌城)·갑암(甲岩)출장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925년 석주 이상룡의 국무령 시절 측근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정의부의 중앙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동년 10월 9일에는 평북 독판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덕수 단학회장 시절 고문은 이탁,여운형, 간사는 주원건,김서준을 두었다. (주원건은 독립신문 1923년 1월 1일에 지난해 도움준 명단으로 이유립 선생 사촌인 이유항(이태집 아들)과 나란히 기록되어있다. 이를 볼때 단학회 시절 간부 명단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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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6세)
그 전해 1921년 9월에 통균사 사건으로 선친 단해 선생이 집행유예로 재가중(在家中)이었고, 3월에 宗靜山下의 井谷으로 옮기고 혈구제(絜矩齊)라는 풀집을 두고 강서(講書)와 연구에 힘썼다. 한편 時中 야학당을 세워 청소년들의 야간교육을 힘쓰기도 했다. (이유립평전 144)
비밀결사 '통균사'와 무기 운반]
이전에 이관집(李觀楫)이 기미년(1919년) 의거를 은밀히 돕고 또 그 아우 이태집(李泰楫), 조카 이양보(李陽甫) 및 문하의 여러 사람과 더불어 통균사(統均社)를 설립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우리나라 전래의 정치 제도를 연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통상을 핑계하여 압록강에 많은 선박을 배치해 두고, 의군(독립군)을 건네주거나 무기를 운반하려 함이었다. 이에 이르러(얼마 안 가), 이태집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됨으로써 통균사의 일 또한 대부분 왜놈들에게 발각되었다. 그 사원(회원)들이 혹은 체포되어 갇히고 혹은 도망가니, 선박과 재물은 모두 왜놈들에게 불태워지거나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 1924년 ~ 27년 : 18세 ~ 21세 삭주읍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삼육회를 조직
1924년 이유립은 전통 학문에서 근대 학문으로 전환하는 결단을 내리고 삭주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당시 18세라는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여건과 그의 집안 분위기를 반영한다. 보통학교 재학 시절인 1924년 4월, 그는 '삼육회(三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청년 및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18세에서 21세까지의 이유립은 삭주읍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삼육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매일 역사와 상식 과목을 강의하고 토론 , 근로작업, 체육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삼육회는 표면적으로는 체육과 문예 활동을 내걸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강연과 토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 단체의 성격을 띠었다. 이유립은 매주 일요일 시사 토론을 개최하고 잡지를 발행하며 삭주 지역의 건전한 학풍 조성에 힘썼다.
▶ 1926년 순종 승하에 통곡 2500명 (이관집 등)
병인년(1926년)에 이르러 융희제(순종)께서 승하하시고 영왕(英王, 영친왕)이 또한 왜인에게 볼모로 잡혀 있어 황위의 맥을 이을 길이 없게 되었다. "하늘이여, 사람이여!" 공이 이해에 이미 쇠약하고 늙어 선비 김시화, 이인수, 김기형과 더불어 상의하여 성(城) 동쪽에 제단을 마련하고 바라보며 곡(哭)을 하니, 당일 참여하여 곡한 자가 2,500여 명이라 하였다.
▶ 1927년 이유립 선생 신간회 삭주지부 발기에 참여했다.
"최석홍(崔錫弘), 김처원(金處元)과 함께 신간회 삭주지부를 발기하고 결성대회를 하다가 구룡포 왜경에 의해 해산을 당하자 만주로 건너가 한동안 머물렀다."... "1927년 신간회 삭주지부 최석홍,김처원 등과 함께 발기하였다가 결성대회의 해산을 당하였다" (양종현,백년의 여정 144쪽)
[팩트체크] 이유립 선생 신간회 삭주지부 발기에 참여했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54
▶ 1930년 삼육사(三育社)의 회장으로 취임 (24세)
1930년 11월 15일 삭주군에 김석순(金碩淳) · 명재수(明在守)와 함께 ‘지덕체(智德體) 3육(育)을 본지로 하여 청년의 인격을 높이고 실력을 양성하며 그 향상 진보를 기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삼육사(三育社)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
20세 전후 이유립의 삼육회(三育會) 조직 활동은 사실 - 한韓문화타임즈
▶ 1931년 5월 삼육사,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 성금 모금
1931년 5월, 충남 아산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묘소와 그 일대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진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덕수 이씨 종손이었던 이종옥이 개인적인 빚을 갚지 못해, 종중의 재산이자 충무공의 묘소가 포함된 땅이 채권자인 일본인 식산은행 등에 압류되었다. 만약 경매가 진행되어 일본인의 손에 땅이 넘어가게 된다면,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우리 손으로 돌볼 수 없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이 사실이 1931년 5월 14일 자 『동아일보』에 "풍전등화에 처한 충무공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자, 전국적인 파장이 일어났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1931년 5월 23일, 각계 인사가 모여 '이충무공 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모금 운동에 돌입했다. 약 1년 동안 진행된 모금에는 국내외에서 약 2만 명에 가까운 개인과 단체가 참여했다. 이유립의 삼육사도 즉시 50전의 성금을 『동아일보』에 보냈다. 금액의 크기를 떠나, 오지의 청년들이 민족의 성웅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모았다는 점이 큰 울림을 주었다. 같은 해 12월 19일에도 만주 동포 위문금 성금 모금 활동에 동참하였다.
▶ 1931년 7월 31일 삼육사 강제해산
이유립은 1931년 《三育》7월호에 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 를 기재했다. 이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 1973년본 광개토왕비문징실(廣開土王碑文徵實) 발간
계연수 선생이 밝힌 광개토태왕비문의 진실, 이젠 알아야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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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징실에는 사라진 비문의 내용에 광개토태왕의 일본열도 정벌 등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
▶ 1933년 명교학원 입회 우등생 수료
1933년 4월 5일 개강한 산하 교육기관인 명교학원에 지원하여 9월 29일 우등생으로 수료하였다.
안순환은 유림의 지지를 받는 ‘조선유교회’를 조직하고 녹동서원에서 인재를 가르칠 석학을 팔도에서 찾았는데 유림의 본거지 안동에서 추천받은 인물이 해창 송기식 선생이었다. 해창 선생은 1932년 녹동서원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녹동서원의 명교학원은 수업은 유학적인 내용이 주류였으나 단군전을 지어 단군의 영정을 모셨다.
물론 총독부의 용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관변적 성격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으나 당시 상황을 보면 국가가 부재한 식민지 현실에서 합법적인 단체 결성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은폐막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조직은 합법적 신분으로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절실한 ‘활동 공간’이었다.
혁신 유림 송기식과 이유립 선생의 오랜 인연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11
"선생의 일생에서 도약기를 꼽는다면 아마 서기 1930년 초반의 청년기에 입경(入京)하여 입회한 안순환이 세운 명교학원 시절이었을 것이다. 가전(家傳)한 많은 서책의 섭렵과 운초, 벽산, 단재의 사관을 기초로 비로소 경향 각지의 학자들을 만나 폭넓게 교류하며 민족주의 사관 정립과 바른 국사 찾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석주의 대동광의, 해학의 유서, 양계초의 음빙실전집을 학구하는 한편 조선유학회 기관지 일월시보 주필로 활동하며 대종교와 단군교의 조직과 활동을 주시하고 장차 단학회의 재건을 모색하였다." - 양종현, <백년의 여정>
▶ 1935년 《일월시보》 주필 역임
이유립 선생이 주필로 있던 때는 일제의 폭압통치가 한창 물오르던 1930년대 말이다. 더군다나 조선국사 말살사업인 <조선사 편수>가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친일 세력들이 굳게 포진(布陣)했으며 친일기관지라고 알려졌던 <일월시보>에 '동방문화의 발상지' '환족'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나라건국' '대 황제'라는 표현까지 당당하고 거침없이 했다. *일월시보는 1935년 2월 8일 창간하고 그해 10월 6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하였다.
조선유교회에 씌워진 낙인, 이유립 친일 매도의 방식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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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명교학원 제1기 수료생들이 녹동서원 앞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맨 뒷줄 왼쪽에서 첫째가 송기식. 출처 : 월간중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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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립과 서신 교류를 했던 송기식 선생. 그는 석주 이상룡과도 계속 서신 교류를 했다. |
해창 송기식, 석주 이상룡에 보낸 편지에 "북부여사는 우리 역사의 정통맥" 천명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3
▶1938년 『동아일보』 삭주지국장을 지냈다
마침 <동아일보>의 필화 사건으로 인한 정간조치가 풀려 민족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백관수>가 1937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1938년 1월 21일 부로 <삭주지국>이 개설되어 임명된다. 그리고 불과 4개월여 만에 그것도 5월 1일 <동아일보 삭주지국장> 자리를 떠난다. 동아일보에서도 차츰 친일적 색채가 농후해지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바치는 듯한' 논조들에 실망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겨우 4개월 남짓 재직하다가 돌연 5월 1일에 사표를 던진 시점이 위에 제시한 <동아일보>의 망언들이 집중적으로 실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그만둔 절차도 본인의 의사에 의한 퇴직인 [의원해직依願解職]이었다.
▶1939년 사설 교육 기관인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 42년 강제폐교
신풍학원 학감으로서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일제 말기, 모든 학교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이라는 광풍 앞에 무릎 꿇을 때, 이유립과 이상유가 이끌던 신풍학원은 끝까지 저항했다.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는 1942년 ‘강제 폐교’였다. (군수 독고휘의 명령으로 폐쇄됨) 세상 어느 친일파가 자신이 세운 학교가 문을 닫도록 저항한단 말인가. 폐교야말로 이들이 일제가 허용한 선을 넘어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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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35세) 삭주 출신의 당시 21세인 신매녀와 결혼
▶ 1945년 4월 비밀결사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삭주책 「대동아전쟁거부론」
저항은 해방 직전까지 이어졌다. 1945년 4월에는 여운형 등이 주도한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建國同盟)의 평북 삭주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전봉천의 「대동아전쟁거부론」 삐라 살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헌병대의 모진 고문과 문초를 받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 반전 삐라를 뿌리는 것은 즉결 처형을 각오한 행위다. 「대동아전쟁거부론」은 일제가 내세운 전쟁 명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이유립이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찬동했다거나 환단고기가 대동아공영권 논리라는 비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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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미나이 ai 생성 이미지 |
▶ 1945년 광복후 단학회 기관지 『태극(太極)』의 주간이 됨
경성감옥에서 19년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광복과 함께 출옥한 이용담 선생은 제5대 단학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3일, 그의 주재로 천마산 제전대회가 거행되었으며, 이 자리에서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 기관지인 『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임명되었다. → 이유립 선생은 5대 단학회장 이용담 선생과의 만남으로 인해 단학회가 부활되면서 그 맥을 이어받아 남한에서 단학회를 재건하고 제6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국통맥과 민족정신을 되살리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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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20년을 복역한 최장기 복역 독립운동가 이용담 선생 |
▶ 1946년 신년호 <신탁통치반대론> 게재로 이유립이 구속되고, 『태극』은 폐간. 삭주검찰소에 구금 2개월 만에 무혐의로 출감.
▶1947년 부친 이관집 선생의 유언
정해년(1947년) 7월에 이르러 병이 들자 아들과 조카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 팔십이 넘었다. 또한 국가가 광복되는 조짐을 보았으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우리 태황제(고종)의 혈육으로 오직 영왕(英王, 영친왕)이 계시는데 비록 왜국(일본)에 있으나 가히 맞아들여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남쪽 나라(남한)에 또 옛 궁전이 있고 윤황후(순정효황후)가 계시니,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모름지기 남한으로 가서 지식 있는 선비들과 많이 사귀어 영왕(英王)을 옹립하도록 도모하라. 이것이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이 뜻으로써 망한 나라를 잇고 끊어진 세대를 잇도록 하라."
하고는, 인하여 시를 읊어 '춘왕정월만년명(春王正月萬年明 - 봄의 왕 정월은 만년을 밝히리라)' 등의 구절을 읊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서거하시니, 이날이 14일이었다.
▶1948년쯤 월남
1948년 5월 월남 도중 해주 소재의 내무국 보안 제7대 정보과에 구금됨. 그해 9월 4일 출감. 에서 붙잡혔다가 4개월 만에 출감, 그해 추석 다음날 밤에 폭우속에서 총성을 들으며 월남하는데 성공하였다. 부인 신매녀 여사(당시 27세)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삼팔선을 넘었다고 한다.
남한땅에서의 새로운 시작. 북녘땅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으나, 남한으로 내려온 후에는 신매녀 여사가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 (신매녀 여사)
같은 때 월남하여 단학회,단단학회에 관여한 이석영
이석영 선생도 같은 1948년 월남하여 충북 청주에서 살았다. 생계수단으로 명리를 보았다. 그를 찾아 밀려드는 내담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명리 공부를 이어가 20년간의 감정과 연구, 실전체험과 학습의 결과로 1969년 <사주첩경> 전 6권을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20세기 한국 명리학의 태두가 되었다. 그는 5대 단학회의 간사를 맡았었고 단단학회 출범시에 본부 준비위원을 역임하고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린 이유립 선생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한국 명리학의 태두 이석영과 단학회,단단학회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04
▶ 1949년 3월 16일 마리산 참성단 제천대회祭天大會에서 회장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 이사장 고경수高景洙와 함께 ‘홍익사弘益社’를 조직하였다. 홍익사는 국사교과서의 주체사관 확립의 건을 문교부장관에게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회장의 서거와 6.25로 의해 자연 해산하였다.
▶1949년 오형기와의 만남과 환단고기 정서 요청
기축년 봄(단기 4282년 서기 1949년), 나는 강화도의 마리산에 들어갔다. 때마침 대영절을 맞아(음력 3월 16일) 대시전에서 정산 이유립 씨를 뵈니, 그가 <한단고기>의 정서의 역할을 나에게 위촉했다. [己丑春 余入江道之摩利山 適値大迎節 謁大始殿 李靜山裕립氏 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 나는 붓이 거칠고 그 중임을 감당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조의 옛 역사를 알고자 하여 이를 승락했다. [余筆荒 雖不能勝重任 爲識我國祖古史 而諾之]
<환단고기>에는 <삼성기 상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상 하> <태백일사>가 실려 있다. 달포 만에 쓰기를 마쳤다. [中有 三聖記上下 檀君世紀 北夫餘記 上下 太白逸史 載在焉 月餘而告紇] 신시개천 5846년 (1949년) 기축 5월 오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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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기는 단순히 글씨를 대신 써주는 필경사가 아니라, 전남 해남에서 ‘해양서당’을 운영하고 향교에서 활동하던 한학자였다. 그는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한학자였던 변시연, 위계도 등과 교류할 정도로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그 학문적 깊이는 곧 그의 필체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었다. (전재우,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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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1949년 환단고기 정서본 ②1979년 광오이해사본 필사 ③1979년 배달의숙본 필사 |
▶51년,52년 영친왕 옹립 시도
이유립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영왕(英王, 영친왕)을 옹립하고자 도모하였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1951년 9월 초순 한독당원인 이유립과 청주상대생인 이용하(李容夏)는 ‘붉은 문화사’란 간판 아래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를 만들었다. 재일 조련(朝聯) 선전부 부책(副責)이라는 이정(李正)의 지령에 따라서 일본에 있던 영친왕 이은(李垠)을 국가 수령으로 받들며, 영친왕 이은에게 보내는 상주서(上奏書)를 윤비(尹妃)에게 전달하였다. 이들은 국호를 대달(大達), 국가(國歌)는 신가(神歌)로, 연호를 개벽으로 정하고 국기도 바꾸려고 하였다. 슬로건은 외세배격, 민족사상통일, 국토통일 등이었다.
▶ 52년 체포와 복역
약 1년간 활동하다가 1952년 6월 무렵에 체포되어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검찰의 3년 구형에도 불구하고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이유립은, 이후 진행된 재심(혹은 상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실제 형기를 채우며 몇 년간 복역한 뒤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5년의 긴 싸움이 무혐의로 처리되었으나 그후로도 몇번의 송사를 60년대 말까지 겪고 더이상 명분만으로는 정치 행위가 불가하다는 인식과 자신으로 인해 동지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어 남은 여생을 국사찾기에만 진력할 것을 결심하였다. ' (이유립 평전 백년의 여정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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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립의 영친왕 옹위, 왕정복고 사건을 다룬 1952년 7월 16일자 경향신문. |
▶1961년 영친왕 귀국 탄원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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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이석영 등 10여명의 이름이 써 있는 편지가 쓰인 1961년은 영친왕이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 중이던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 편지처럼 각계각층의 귀국 탄원과 혁명 정부의 결정이 맞물려, 마침내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은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당시 이미 의식불명 상태에 가까워 병상에서 여생을 보내시다 1970년에 서거하였다.
이유립, 왕정복고 실패 후 환단고기 창조?…학문의 탈을 쓴 인격 살인 !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22
▶ 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 : 한암당이라는 호가 생긴 2층 적산 가옥
1950년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친척집에 살다가 1963년(57세)에 대전 은행동에 정착하였고, 그해 11월 단학회를 단단학회로 개칭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과 강연에 전념하였다.
이유립 선생 댁은 대전 목척시장에 있는 1-2층 적산가옥에서 살았는데 그 집은 지금도 그대로 낡은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층은 3평 정도로 부엌과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2층은 이유립 선생의 서재로 쓰고 있었는데, 그 서재 이름이 한암당(寒闇堂)이었다. 여기에서 이유립 선생은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창립하고 신매녀 여사의 내조로 대전시 은행동 셋집에서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다.
"선생님 댁은 목척시장에 있는 1,2층 적산가옥이었는데 지금도 그 집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도. 그 집에 1층은 3평 정도 되는데 2층은 선생님이 서재로 쓰고 그 서재 이름이 한암당이었습니다. 1층에서 선생님 앞에 앉으시고 처음에는 저 혼자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제가 선생님 말씀 배우는 게 아주 유익하고 좋아서 주위 친구들을 모아가지고 11명이 같이 공부하게 됐습니다." (양종현 선생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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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이 세운 것은 '교단'이 아니라 '대한의 역사'였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1
[참고] 1962년 장도빈 선생 환단고기를 언급하다.
장도빈 선생은 1962년 무렵 아들 장치순 교수에게 “환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근본 사상이 담겨 있다. 학문을 한다면 반드시 이 책을 탐독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국대 설립자 장도빈 선생, 1962년 ‘환단고기’ 언급했다는 충격 증언 화제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22
[참고] 1965년 완성된 단서대강에도 환단고기 명칭 등장
전재우 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심당전서』의 핵심 저술인 『단서대강(檀書大綱)』은 이고선 선생이 19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65년에 완성한 역작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1965년에 이미 완성된 이 책의 본문에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명칭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며, 『단군세기』, 『북부여기』, 『삼성기』 등의 내용을 상세히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5년에 집필이 완료된 『단서대강』을 비롯하여 1952년의 『홍익대전』, 1924년의 『환단세감』 등에서 『환단고기』의 인용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되며, 심당 선생이 1911년 초간본을 구득하여 참조했음이 분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1965년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 시작
이유립은 대전 은행동 자택에 단단학회 본부를 두고, 1965년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역사 관련 저술과 더불어 역사 교육을 실시하고, ‘국사 광복’을 외치는 전단도 만들어 돌렸다.
▶ 1966년 환단고기를 처음 본 고등학생 양종현

▶ 양종현,오선일 학생에게 계연수 선생 초상화를 그리게 하다
이유립이 회고하는 운초 계연수의 모습은 숱이 성긴 수염과 살집 없는 검은 얼굴 속에 형형히 빛나는 안광이 인상적이었다 한다. 낮지만 보통 톤의 단전에서 울리는 음성이 친근하고 자상했다고 한다.
이유립 선생은 해방후 남한으로 내려와 대전에 정착하며 '양종현'과 '오선일'이라는 그림을 잘 그리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제자를 두게 되어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계연수 초상화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 그림이 이 두 사람에게서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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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의 기억으로 그려진 계연수 초상화는 진짜였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11
사진은 없지만, 실존은 남았다 ― 운초 계연수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2
▶1971년 홍익사서 해설,주석서 『환단휘기』 발행 (feat 환단고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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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 민족의 4대 경전, 즉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태백진훈을 중심으로, 원문을 제시하고 그 의미를 풀이한 해설·주석서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가 민족의 역사서라면, 환단휘기는 민족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해설한 경전 주석서라 할 수 있다.
『환단휘기』는 단학회에서 1971년에 간행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편 『천부경연해(天符經衍解)』 2편 『원본삼일신고집해(原本三一神誥集解)』
3편 『참전계경(參佺戒經)』 상·하 4편 『태백진훈(太白眞訓)』 상·중·하
이 구성만 보더라도, 『환단휘기』가 『환단고기』를 재편집하거나 변조한 책이 아니라, 『환단고기』와 관계없이 <홍익사서>를 이해하기 위한 해설 작업임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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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환단휘기: 서로 다른 문헌, 다른 역할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95
▶ 1973년본 광개토왕비문징실(廣開土王碑文徵實)
불행하게도 계연수가 이유립에게 주었다는 비문징실 원본이나 삼육7월호에 실린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지금 현존하는 것은 이유립 선생의 "廣開土王聖陵碑文譯註"(서울 대동문화사 1973년판)[중앙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소장]와 "韓國學"(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제1집(1973년)에 실려 있는 "廣開土王碑文徵實" 뿐이다.
여기에는 계연수와 이관집이 1898년 5월과 1912년 5월 2번에 걸쳐 비를 찾아가는 동안에 있었던 일,비에 참배하고 비문을 베끼는 과정,글자의 징실에서 자획에 대한 인상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비의 구조, 크기, 자수, 암석의 질, 비의 형태, 비각의 유무 등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해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同源論)』도 펴냈다.
▶ 1976년 환단고기 초간본 분실 사건
초간본 환단고기가 분실된 내막은 무엇인가? 기존에는 한국전쟁 때 금산에서 화재로 소실되었다, 성남 거주 시에 큰 홍수로 분실되었다는 설들이 있었는데, 양종현의 증언에 따르면 그 전말은 이렇다.
1976년 의정부에서 살 때, 생활이 궁핍했던 한암당 일가는 집세가 5개월이나 체불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박창암 장군의 배려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군산에 사는 종친인 이공빈이 운영하는 병원(공안과)에 5일간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이를 야반도주로 여긴 집주인이 소장되어 있던 이유립의 책들을 모두 팔아버렸고, 그 와중에 초간본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오형기의 필사본이 남아 있어서 환단고기 전수 맥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이로 인해 한암당은 초간본을 내놓으라는 공격성 주장에 마음고생을 하게 되었다.
▶ 1976년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
1976년에 의정부로 거주지를 옮겨 『커발한문화사상사』 I·II를 발간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 박창암(朴蒼巖)·안호상(安浩相)·문정창(文定昌)·임승국(林承國)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였다.
▶ 1976년 ~ 자유지 기고
이후에 ‘간도 땅’ 문제에 관심이 컸던 박창암(1923~2003)과 연결되어 1976년부터 월간<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자유>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채우며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 역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 1979년 환단고기 광오이해사본의 출간
그 후 환단고기의 대중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한암당에게서 역사와 한문을 배운 당시 24세의 문하생 조병윤趙炳允이 1979년(신시개천 5876년)에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影印하여 100부를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 놓았다. 이에 한암당은 사태 수습을 위해 조병윤을 파문하였고(이 사건으로 조병윤은 승려가 되었다고 하고, 현재 그 생존여부와 소재는 계속 탐문중이다)
▶ 1980년 환단고기 배달의숙본 출간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는 여관방에 모여 급하게 쓰다 보니 한 두 줄이 빠진 부분도 있고, 오탈자의 오류가 많았다. 이에 이유립은 『환단고기』 정본을 만들기 위해 오형기에게 정식으로 정서를 요청하였고, 이것이 오형기가 『환단고기』를 3번째 정서하게 된 배달의숙본 『환단고기』이다. 배달의숙본 『환단고기』 역시 한정본으로 이석영의 재정 후원으로 100부 인쇄되었으나, 실제로 이 배달의숙본 『환단고기』는 세상에 바로 유통되지는 않았다. (전재우 논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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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가시마노보루 일본어판 '환단고기-실크로드 흥망사'를 출간
이유립은 1979년경 박창암에게 환단고기 원고를 전달하였는데, 이는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의 공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창암은 당시 일본의 역사 연구자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와세다 대학 법학부 출신의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창암은 한국 상고사의 위대함을 일본에 알리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유립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1979년 가을 가지마 노보루에게 환단고기 원고를 전달하였다.
1982년 가지마 노보루는 자신이 설립한 '역사와 현대사(歷史と現代社)'를 통해 일본어판 '환단고기-실크로드 흥망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한문 원문과 일역문을 나란히 배치한 대역본 형식이었으며, 책의 말미에는 조병윤의 광오이해사본을 그대로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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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는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하였다.
말년의 일화
한번은 선생이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고 하였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중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했으나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런데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박정학 증언)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역사광복을 향한 열정
한배달 박정학 이사장에 의하면 뜻있는 분들의 성금으로 선생에게 조그만 집을 마련해 드렸는데 이 곳에서 온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역사지킴이로 살다간 한 풍운의 선비가 생을 마감했다.
1986년 4월, 강연 중 쓰러져 향년 80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사광복운동”을 강조하며 역사 복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유립은 평생 동안 일신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 광복에 매두몰신하였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헌신하며 『환단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린 한암당 이유립! 그는 『환단고기』의 모든 글을 감수하고 조선의 망운에 목숨으로써 답한 해학 이기와 『환단고기』를 처음으로 발간하고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운초 계연수, 이 두 분과 마찬가지로 ‘국사학의 대부’이다. 이분들의 고귀한 희생 덕에 오늘날 한민족의 정통 사서 『환단고기』를 볼 수 있고, 9천년 한민족사의 정통 맥과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생활은 극도로 궁핍했지만, 그는 끝까지 학문과 사명을 놓지 않았다. 제자들과의 강의와 집필을 통해 남긴 사상은 사후 『대배달민족사』로 정리되어 출간되었으며, 이는 그의 역사 인식과 민족관을 집대성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박정학씨 회고에 의하면 한암당 선생은 만년에 고려원 사장이 빌려준 사무실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대배달민족사를 저술하시었다고 한다. 대배달민족사는 전5권으로 고려원에서 한암당 선생의 사후에 기념사업으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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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87년 4월 21일 |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부터 해방 직전까지 만세운동, 독립군 통신원, 항일 교육, 반전 삐라 살포, 투옥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저항의 길을 걸어온 독립운동가였다.조선유교회나 잡지 기고 활동은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망 속에서 민족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며, 그가 정립한 사학 체계는 식민사관의 굴레를 벗겨내기 위한 역사 광복의 청사진이었다. 그의 뜻을 계승한 제자들과 동지들은 이후 다양한 방면에서 민족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암당 서거 40주년이 주는 시대적 교훈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서거 40주년을 맞아 우리가 그의 생애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식민지 청년으로서 총을 들고 전장을 누볐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펜을 들고 역사 전장을 지켰다. 그가 전수한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이 가야 할 미래의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우리는 이제 그에 대한 무분별한 폄훼와 매도를 넘어, 그가 남긴 자료들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그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유립 선생이 꿈꿨던 '대배달의 영광'은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귀한 정신적 가치와 원형문화를 회복하고 이를 인류 문명에 기여하는 길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80년 생애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역사를 얼마나 제대로 알려고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40주기를 맞는 오늘날 우리의 진정한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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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당 이유립 (1907 ~ 1986)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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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